2) 개화기의 교육
조선왕조가 쇠락한 19세기 말엽 근대 서양 문물의 유입과 서구 열강의 개방 압력에 직면하게 된 이른바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교육에도 근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교육 근대화의 필요를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개항지의 주민들이었다. 교육 근대화의 필요를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개항지의 주민들이었다. 개항으로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상인들이 밀려옴에 따라 그들은 근대적 경영방식, 국제무역, 외국어, 새로운 학문, 바깥세상에 관한 지식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한 지식의 결핍은 현실적으로 외국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패배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이 잘 드러난 곳이 원산의 개항지였으며, 주민들의 교육 근대화의 요구는 원산학사의 설립으로 나타났다(김태근, 2019; 신용하, 1974, 1980). 원산학사는 1883년에 설립되어 조정의 윤허까지 받은 정식학교였다. 개항지에 필요한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가르치는 근대적 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지방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서서 기금을 모아, 지방 관료와 협력하에 학교 문을 열었다. 교육과정은 문반과 무반으로 나누어, 문반은 상업과 해외무역 및 행정에 필요한 내용을 가르치고, 무반은 치안유지에 필요한 군사훈련을 중심으로 가르쳤다. 원산학사를 주민과 개화된 지방행정관료의 합작품이며 전통적 교육기관인 서당을 근대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외래의 근대적 교육기관의 이식이 아니라 자생적 근대교육기관이라는 특징을 지닌다(신용하, 1974). 이는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된 교육제도를 발전시킬 역량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에 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와 일제 식민지 지배자들이 설립한 학교를 거론하여 개화기 및 그 이후의 교육 근대화를 외생적 발전으로만 설명하는 입장은 이런 점에서 옳지 않다.
당시 조선 정부의 교육근대화를 위한 주체적 노력은 육영공원의 설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육영공원은 1886년 6월 조선정부가 처음으로 설립한 신식학교로 영어교육과 함께 이용후생을 위한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을 도입하기 위하여 설립한 학교였다(류방란, 1992; 박종배, 2020; 서명일, 2014; 최보영, 2012).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을 거친 이듬해인 1895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교육법규인 '한성사범학교관제'를 비롯하여 10여 개의 교육법규를 제정하고 국립과 공립의 초등학교들을 설립한다. 한편, 기독교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인 설립학교는 1885년의 배재학당을 출발로 하여 1895년까지는 열 손가락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부는 근대적 학교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은 근대적 국민교육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초등학교인 소학교의 설립을 서둘렀으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우용제, 1999). 당시의 정치사회적 정황으로 보아 계획을 일관성 있게,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고, 학교설립에 필요한 재정의 확보 및 훈련받은 교사의 확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성사범학교관제' 및 '소학교령'의 제정과 학교설립의 추진 노력은 당시의 대한제국 정부가 국내외의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주도적으로 교육개혁을 추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국민초등교육제도 수립의 필요를 외국의 자극을 받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그보다 100여 년 전부터, 즉 18세기 실학자들의 보편적 국민교육론에서 출발하여 국내 지식인들의 국민초등교육에 대한 주장이 누적되어 있었다(서재복, 2011; 우용제, 1999).
근대적 국민교육을 위한 노력을 정부만 기울였던 것은 아니다. 민간의 학교설립운동도 활발하였다. 주목할 점은 소학교령 등 각종 교육법령의 버뮈 내에서만 학교설립운동이 추진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소규모의 교육기관들이 제도적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이곳저곳에서 운영되었다. 학교시설, 교사, 교육과정 등이 법령에 의한 정식학교처럼 제대로 구비된 것은 아니었으나, '신학문'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열의만으로 교육활동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민간의 교육활동은 정식학교에 비하여 그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전국에 공립의 소학교가 1905년 통감부 설치 당시에 60개 정도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류방란, 1992: 39) 그 무렵에 크고 작은 민간 교육기관이 5,000개에 달하였으며, 1908년에 공포된 사립학교령에 따라 통감부에 학교인가를 신청한 수가 1,217개였다(한국교육사연구회, 1972: 238).
요약하면, 19세기 말에 진행된 교육의 개혁은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었다. 군주제도를 벗어나 민주사회로 가기 위한 노력, 폐쇄적 은둔국으로부터 개방적으로 국제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노력, 유학 일변도로부터 서구의 새로운 과학주의를 받아들이려는 노력,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한반도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투쟁하는 열강의 무력한 희생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필사적인 국력배양의 요쳥,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 교육의 개혁을 조야가 한마음으로 추진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미 그보다 100여 년 이전부터 실학자들이 교육을 개혁하여 국민교육제도를 수립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누적되어, 19세기 말의 시대적 상황에 이르렀을 때 교육개혁운동은 일시에 분출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변혁은 사회변혁의 한 부분이지만, 사회변역을 촉진시키고 때로는 선도하는 적극적 부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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