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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학(37). 한국교육제도의 변천_근대적 학교제도의 도입-1-

나기log 2022. 6. 2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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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화기 이전의 교육

 우리나라는 서구문명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19세기 말에 근대적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전까지 참으로 긴 세월동안 유학 중심의 교육제도를 지켜왔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불교가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고려시대에도 교육은 유학 중심이었다. 전통사회의 교육기관들은 관리의 양성과 선발을 주목적으로 지배계급의 남자들을 대상으로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학과 중국의 고전을 가르쳤다. 시대에 따라 교육기관의 명칭이 바뀌고 교육수준도 점차 향상되었으나 교육내용의 성격은 유지되었다. 초급교육은 물론 한문읽기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한자는 읽고 쓰기를 배우기가 어려운 데다 농민 등 하층민과 여성에게는 교육받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스스로 글을 배우는 것도 억제되었다. 교육기회는 소수의 지배계급 남자들에게만 독점적으로 주어졌다. 백성들 대부분은 비문해, 즉 문맹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문자생활과는 유리된 채 살 수밖에 없었다. 무지한 백성일수록 다스리기가 쉬웠기 때문에 인류 역사를 통하여 어디에서나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의 배울 기회를 봉쇄하고 무지한 사태를 유지시켰다. 무지는 사람에게 무력감과 공포심을 조성하여,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의 전통사회도 긴세월 동안 백성을 무지하게 만들어 놓고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스려 왔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세종 대왕이 우리의 글자인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에게 문자생활의 길을 열어주고 학습기회를 확대한 것은 참으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여전히 한문 사용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이 한글을 깨우쳐도 지배계급이 독점하고 있는 한문 중심의 문자생활과 그들의 지배문화에 접근하는 길은 20세기에 민주국가를 수립할 때까지 막혀 있었다. 

 교육기관은 조정, 즉 중앙정부와 지방관서가 설립 운영하는 관학과 민간이 운영하는 사학이 언제나 병존하였는데, 왕조 초기에는 관학을 강화하지만 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사학의 발호를 용인하는 경향이 고려와 조선에서 반복되었다. 왕조의 초기에는 집권세력을 강화하고 지배계급 충원을 관리하기 위하여 관학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왕조의 지배집단이 안정되면 지방의 호족들에게도 관리진출의 기회를 주어 불만을 해소시켜야 하였으므로 지방의 사학에 허용적인 정책을 시행할 필요가 있었다. 

 교육제도는 대체로 관리임용시험제도인 과거제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운영되었다. 그렇기는 해도 교육기관을 거치지 않고 과거에 응시할 수도 있었다. 과거는 여러 기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되었으므로 응시자격을 성균관을 비롯한 관학을 거친 사람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허용되었다. 따라서 과거시험에 대한 관학의 지배력은 한계가 있어서 사학을 통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운영한 성균관 같은 최고 교육기관은 과거를 위한 준비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교육이 관리임용과 긴밀한 관계까 있었으므로 교육기관, 특히 관학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하에 있었다. 학생의 선발, 교육과정, 학사운영, 교수임용 등이 엄격한 통제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교육전통은 서양과 다르다. 서양의 교육은 가정교사들에 의한 가정의 사교육이 한 부분을 차지하였지만 오랫동안 교회의 지배하에 있었다. 중세시대는 교회가 국가통치권까지 장악하였으므로 교회가 교육을 지배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세 이후로도 교육은 교회가 장악하고 있어서, 학교의 대부분은 교회가 운영하였다. 19세기에 공교육제도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서양의 교육은 세속 정부가 아닌 교회의 관리하에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근대적 학교제도 도입 이전에도 국가가 교육을 지배하고 운영하였다. 사학도 활발하였지만, 국가의 교육정책과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고려에서 조선조 말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교육지배방식은 독특하였다. 국가가 직접 교육기관을 운영하여 교육하는 데에 주력하기보다는 시험제도를 통하여 학습활동을 관리하고 학습내용을 통제하였다. 국가가 관리임용과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시험제도인 과거제도를 직접 운영했기 때문에 관리에 임용되거나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이 요구하는 내용을 스스로 학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국가가 오늘날의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을 필요한 만치 설립하여 운영하지 않으면서도, 국민들이 독학으로 공부하거나 마을별로 또는 지역별로 사설 교육조직을 만들어 공부하도록 조장하였다. 국가가 설립 운영한 교육기관은 소수에 불과하였으므로, 지배층 남성들이 서당과 서원 같은 사설 교육조직에서 공부하거나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조 말까지의 학습내용은 유학이 중심이었다. 그 이유는 역대 왕조의 통치원리가 유학에 토대를 두고 있었으므로 과거시험을 유학의 경전에서 출제하였기 때문이다.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와 고급관리를 선발하는 중앙의 대과 또는 문과의 출제내용은 모두 유학을 벗어나지 않았다.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 등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를 거쳐 조선왕조를 마감할 때까지 교육내용은 줄곧 유학을 견지하였다. 이처럼 긴 역사에 걸쳐 왕조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교육내용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유학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사실도 특히 주목할 대목이다. 교육을 통해 그 사회의 이념이 유지된다고 본다면 한국의 교육은 역사적으로 유학에 토대를 둔 이념의 재생산에 매우 충실한 역할을 해왔다.

 조선왕조의 후반기인 18세기에 이르러 과거 등 교육제도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개혁론이 제기된다. 실학자들이 주도했던 교육개혁 논의는 국가 전반에 대한 개혁론의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종의 근대교육체제 수립을 목표로 삼았던 이들의 개혁론은 실현되지 못한다(우용제, 1999: 17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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