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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학(30). 교육제도의 형성과 확대_국민교육제도의 등장과 그 특징-2-

나기log 2022. 6. 2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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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샬로테와 콩도르세의 교육론은 프랑스 혁명 진행 과정에서 주도권 다툼을 계쏙했다. 혁명 초기에는 진보적인 콩도르세의 '공교육론'이 강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혁명의 진행이 여러 반대세력의 저항으로 머뭇거리자 강경파가 등장하여 무력과 공포정치로 상황을 돌파하면서 강력한 국가권력을 선호하는 '국민교육론'이 지지를 받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콩도르세는 반혁명자로 체포되어 자결하고 그의 교육론은 폐기된다. 그 뒤에 곧 반전이 일어나 새로 집권한 정권에 의해 콩도르세는 복권되고 혁명과 자유주의 공화정의 옹호자로 추앙받게 된다(Soboul, 1995/2018: 716-720; 장세룡, 2019: 153-158).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혁명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체제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집중한다. 이들은 새로운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서로 전쟁을 치르며 강하고 통일된 국가의 건설에 모든 노력을 쏟는다. 지식으로 무장하고 애국심이 강한 국민을 양성하는 보편적 교육제도의 확대는 필연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샬로테의 '국민교육론'은 다시 주목을 받고, 이후 20세기까지 그에 토대를 둔 국민교육제도가 세계 각국으로 퍼진다.

 '국민국가론'에서 출발한 국민교육체제가 이렇게 전 세계로 확산되어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동력을 제공하는 시기에도 콩도르세의 '공교육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공공재정으로 시민에게 교육기회를 보장하더라도 교육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제한하고, 각 개인의 교육 필요와 목적을 존중하며, 학습의 자유와 학습자 중심 교육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은 교육실천과 교육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에 이르러서도 국민교육체제가 여전히 지배적이었지만, 교육자와 학습자의 자율을 존중하는 '공교육사상'에 대한 지지도 점점 더 강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육자와 학습자의 자율을 지키며 확대시키는 교육운동이 세계 각국에서 등장하면서 교육체제의 형태는 국민교육이지만 운영 방식과 내용은 점차 자율을 강조하는 공교육의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나라에 따라서는 교육개혁을 통해 국민교육체제를 약화시키고 공교육체제를 강화시키기도 하고, 공교육체제를 지향하는 의미로 '국민교육'보다 '공교육'을 용어로 선호하는 경우가 흔하다. 

 결국 국민국가 건설 당시의 유럽인들의 지배적 의식은 국가가 국민의 교육을 담당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굳어졌고 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정의 사교육과 교회의 교육사업이 일반적이었던 상황에서, 국가가 교육에 개입하여 계급과 빈부를 초월하여 모든 아동을 국가에 충성하는 유능한 국민으로 가르치는 국민교육의 실시는 새로운 국가건설의 핵심이 되었다. 시민계급에 의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은 국민형성과 분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국가주도의 국민교육은 사교육 사상에 대한 국민교육 사상의 승리였다. 국민교육 사상의 중요한 기초는 보편교육 사상, 즉 만인의 교육받을 권리를 주창한 것이었다. 국가는 충성심이 강한 유능한 국민을 육성하기 위하여 보편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계급과 빈부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평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보편교육은 국민의 입장에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국가에 의한 국민교육제도는 자연스럽게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의 실현이라는 가치를 표방하게 된다(김신일, 2005: 41-48). 그리하여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에 서양 각국은 '교회로부터 자유로운' 국민교육체제를 확립하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자신이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 국가통제 교육체제가 몇 차례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굳혔다. 영국은 교회와 세속 국가 간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미국은 각 주의 책임하에 국민교육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독일은 피히테(Fichte)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통일된 독일의 융성과 발전을 위해 국민교육제도를 구축하였다.

 국민교육을 위한 교육체제의 확립은 새롭게 탄생한 근대국가와 세속정부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과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교황이 유럽 전체를 통일된 단일 체제로 유지하던 시대가 끝나고 민족국가로 분할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민족국가 간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국가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제도가 필요했다. 국민 전체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강한 국민의식과 유용한 지식으로 무장시켜야 국가가 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했다. 그러므로 사립교육기관의 설립을 허용한다 해도 국가가 통제하는 제도하에서 운영되어야 했다. 이는 중세시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교육적 필요가 나타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즉, 교육이 개인의 필요나 종교의 필요가 아니라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운영되기 시작했다(Boyd, 1964/ 2008: 403-406).

 그런데 국민교육을 위한 의무적 학교교육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강했지만, 학교의 신속한 설립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유럽의 대다수 국가에서 초등교육이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셔였다(Schuleunes, 1989: 1-7). 미국을 포함하여 서양 국가들 가운데 국민교육의 대중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체계적으로 추진한 나라는 오늘날의 독일인 프러시아와 바바리아였다. 독일의 국민교육제도는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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